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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리더십
김형태 박사(전 한남대학교 총장)
 
편집국   기사입력  2017/05/26 [16:31]
▲ 김형태 박사(전 한남대학교 총장)     ©편집국
민주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끝부분에 나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정부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하나 더 욕심을 낸다면 ‘국민과 함께’(with the people)를 첨가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 정계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원칙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중요한 국가정책이나 민생문제가 다루어질 때는 여·야 만장일치를 보여줌으로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든든한 믿음으로 생업에 열중하게 해줄 수 없을까?

외교나 국방 같은 문제는 기본 골격을 봐야지 지엽적인 나뭇잎이나 곁가지를 갖고 소모적인 논쟁을 일으켜선 안 될 일이다. “見指忘月”(달 보라고 손가락질했더니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각 정당마다 신실한 책사(策士/謀士/wonderful counselor, 멘토, 코치, helper, advisor, guide)를 채용하여 정돈된 내용을 가지고 지혜롭게 국가 경영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국민을 불안하고 속상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박현모(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의 글을 통해 세종대왕(1397-1450)의 리더십을 소개하고 싶다.

세종은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18년에 즉위해 1419년에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고 1420년 집현전을 설치했으며 1432년 4군6진을 개척했고 1446년 한글을 제정한 현군이다. 그러나 즉위 후에 돌아선 신민(臣民)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돌아서게 하는 일이 최대 숙제였다.

조선시대 초기 ‘건국’과 ‘개혁’ 과정에서 국가 원로들이 소외되자 “지금의 인심은 옛 것을 버리고 새 것만 취하는 경향이 있다.(진보개혁 유행) 자손들을 위한 계책도 마련해야 되겠지만 늙은 자를 버리고 돌보지 않는다면 이 나라가 장차 어찌 되겠는가?”(태종실록 18년 5월 11일)라는 개탄이 나왔다.

제자가 스승을 죽이라고 탄핵하고(정도전과 이색) 자식이 父王의 뜻을 저버리는가 하면(이방원과 이성계) 수차례의 형제 간 권력다툼(왕자의 난)까지 불거지자 백성들은 “이 싸가지 없는 정권”의 향방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하루 한 끼로 연명하거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흙을 파 떡과 죽을 끓여먹는 상황(경제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만 했다. 굶주린 백성은 산속으로 들어가 초적(草賊)이 되거나 집단으로 나라를 떠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조정 신료들의 침묵과 눈치 보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나라의 희망은 없다는 것이 세종의 판단이었다. “올 겨울은 지나치게 따뜻하다. 봄처럼 따뜻해 얼음을 저장할 수 없고 또 어제는 짙은 안개가 끼어 매우 상서롭지 못했다. 이런데도 아직 과감한 말로 내 허물을 쟁간(爭諫)하는 자가 없으니 이상하지 않으냐?”(세종실록 7년 12월 8일)

태종이 사망한 지 3년이 지났지만 태종 때 형성된 관료들의 복지부동은 변하지 않았다. 하기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온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살벌한 시대를 겪은 터라 쟁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때 세종은 회의 분위기부터 바꾸었다. 즉위한 지 사흘 만에 세종은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 우의정 등과 함께 의논해 벼슬을 제수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도승지 하연은 “전하께서 초정(初政/첫 정사)을 의논으로 시작하신다니 매우 다행입니다.”라며 환영하였다. 당시 22세의 나이였고 학문과 정치적 경륜이 뛰어났던 세종이 인물을 모를 리가 없지만 정치란 왕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는 인식에서 나온 말일 게다.

세종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직언을 요청했고 말끝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때로는 논전(論戰)과 ‘끝장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토론을 즐기는 군주’(樂於討論)라고 불렀다.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과 인물들은 바로 이런 회의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신분을 초월해 인재가 천거되고 그들이 사명감을 갖고 충성했기 때문이며 이런 회의를 거쳐 100여 명의 집현전 학자가 나와 새 왕조의 예제와 법전이 마련되고 민생을 돌보는 공직자들이 되었고 역사에 길이 남을 한글도 창제된 것이다. 특히 이 시대에 세종대왕 같은 지도자가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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